영상물 리뷰

[리뷰] 날씨의 아이: ★★★

김대충_ 2024. 9. 28.

(스포일러 주의)

0. 들어가며

'날씨의 아이'를 보았다. '너의 이름은'은 극장에서 봤고 '스즈메의 문단속'은 집에서 봤는데, 나는 엄청난 영화광은 아니지만 신카이 마코토의 영화는 오락 영화로서는 항상 1인분을 하는 것 같다. 막 엄청난 명작을 찍어내는 양반은 아닐지 몰라도 언제나 적당히 재미있게 볼만한 영화를 만들어준다고 생각함. 이번 영화도 비슷한 느낌이었고, 사실 앞서 봤던 2개의 작품보다 이게 좀 더 좋았다.

1. 비주얼

새삼스럽게 따로 적을 필요가 있겠나 싶긴 한데 이 영화도 비주얼이 정말 끝내준다. 매번 볼 때마다 사람 손으로 그린 애니메이션에서 저 정도 퀄리티가 나올 수 있나 싶고.. 그런 잘 그린 그림들이 살아 움직이는 걸 보면 그냥 그 자체로 재미있다. 이거는 작화가 끝내주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영화를 보면서 내가 무의식적으로 작업 과정을 상상하게 되기 때문인 것 같다. 동세가 휘몰아치는 장면 같은 걸 보면 그 뒤에 숨겨진 애니메이터들의 피와 땀이 보이는 것 같고 뭐 그러함..

비주얼이 끝내줘요

2. 도쿄

작중 무대가 도쿄인데.. 나는 작년과 올해 2번에 걸쳐서 도쿄에 여행을 다녀왔기 때문에 아주 즐겁게 볼 수 있었음.. 올해는 시부야와 신주쿠를 여행했는데 작중에 여행했던 장소가 계속 나오니까 추억 돋고 좋았다. 작중에 스쳐가는 이런저런 장소들이 왠지 다 한 번씩 가봤던 것 같고.. 특히 가부키쵸나 신주쿠 역이 등장하는 장면은 진짜 여행 때 봤던 그 기억을 다시 소환해주는 느낌이라 아주 좋았음..

도쿄의 구석구석을 사실적으로 담아내었다

3. 스토리

신카이 마코토 아저씨는 인간의 힘으로 막을 수 없는 자연재해라는 소재를 특정 개인의 운명과 결부시키는 걸 대단히 좋아하는데.. '너의 이름은'이나 '스즈메의 문단속'에서도 그랬듯 이 영화에서도 비슷한 전개가 등장함. 우연히 재앙을 막을 힘을 지니게 된 급식 고삐리들의 갈등과 선택과 연애를 관람하는 것이 신카이 마코토 영화의 근본적인 재미라고 할 수 있겠다..

 

사실 이게 세 줄 요약을 해놓으면 진짜 말 같지도 않은 소리이고.. 특히 30대를 넘어가고 나니까 이런 허무맹랑한 얘기에 감정적으로 잘 동요하게 되지 않는 것을 느끼게 됨.. 볼 때는 그냥 예쁜 그림과 좋은 음악에 취해서 대충 즐겁게 보는데 다 보고 나서 감정적인 여파가 크게 남지는 않는다는 것임. 이게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영화가 가진 장점이자 단점이겠고.. 그래서 나는 지금까지 이 아저씨 영화에 항상 높지도 낮지도 않은 별점을 매겨왔음..

 

그러나 '날씨의 아이'는 그런 영화들 중에서 그나마 좀 쓸만하다고 나는 생각했는데, 주인공의 선택이 아주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 영화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예쁜 그림으로 포장된 트롤리 딜레마라고 할 수 있는데, 소수를 희생해서 다수가 행복해지는 상황이 옳은가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음.

 

내가 봐 온 많은 영화들에서는 감독들이 한 놈을 버리고 나머지가 사는 쪽을 선택했음. 이런 장면은 너무 많아서 하나하나 손에 꼽기도 힘든데.. 뭐 얼른 떠오르는 것만 적어보자면 '괴물'의 변희봉이나 '아마겟돈'의 브루스 윌리스, '어벤져스: 엔드게임'의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생각남.. 이런 희생 장면을 쓸 때는 (1) 그 희생이 반드시 '본인의 의지'로 이루어져야 하며, (2) 해당 희생의 덕을 본 사람들이 희생자를 존나게 추모해주어야 한다는 불문율이 존재함.. 제정신이 박힌 영화라면 음악도 빵빵하게 깔아주고 등장인물들도 슬픈 표정 존나게 지어주어야만 한다는 것임..

숭고한 희-생

그러나 '날씨의 아이'는 정반대의 노선을 택함. '나는 나의 행복을 취하겠음. 그 결과 님들의 인생이 망가진다고 해도.' 이게 주인공들의 기본 스탠스임. 그래서 주인공들의 선택의 결과로 도쿄는 3분의 1이 물에 잠기게 됨. 이렇게 얘기하면 주인공들이 대단히 쓰레기 같아 보이는데.. 2시간의 러닝타임을 통해 이 선택을 설득력 있게 잘 포장해냈다는 점에서 나는 신카이 마코토 아저씨가 꽤 일을 잘했다고 생각함.

 

'날씨의 아이'에서 호다카와 히나의 선택이 말이 되는 이유는 이 영화에서 묘사되는 세상의 형태가 지극히 현실적이고 인간적이기 때문임. 주연, 조연, 엑스트라 할 것 없이 등장인물들은 각자의 사연이 있으며, 그런 사연들을 토대로 선택을 하는 장면이 꾸준히 등장함. 그리고 그 장면들에서 묘사되는 행복은 대부분 개인적인 것임. 이를테면 스가 케이스케가 딸을 계속 보기 위해 호다카를 내치는 장면이 있는데, 내가 스가였어도 당연히 혈육을 선택할 것 같고 아마 다른 사람들도 그럴거라고 봄..

만악의 근원

어떤 영화들은 주인공의 선택을 강조하기 위해 다른 등장인물들을 주인공의 선택이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NPC처럼 묘사하곤 하는데, 이 영화는 그런게 없음. 리포터는 기사를 쓰고 경찰관은 수사를 하고 선로 수리공은 수리를 하며 대중은 트위터를 한다.. 그러다보니 등장인물들의 행동에서는 절대적인 선악 구도나 당위 같은 것들이 별로 부각되지 않음. 그냥 지 할 거 하면서 대충 벌어먹고 행복하게 사는거지..

 

'도쿄가 물에 잠기는 한이 있어도 히나를 구한다'는 호다카의 선택도 이런 소시민적인 차원에서 다뤄져야만 설득력을 획득할 수가 있음. 맛대가리 없는 가지볶음을 남기면서 아프리카의 기아를 떠올리는 사람이라면 이런 선택이 좆같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어쨌거나 호다카 개인에게는 히나를 구하는 쪽이 훨씬 더 스스로를 행복하게 하는 선택인 것임..

 

다른 등장인물들은 당연히 그 선택을 싫어할 수 있겠지만, 그 선택을 도덕적이지 못하다고 비난할 권리는 없음. 시발년들아 내가 내 썸녀 구한다는데 니들이 뭔데 나한테 지랄이셈?이라고 반박 가능한 부분인 것임.. 뭐 지가 날씨의 아이 되고 싶다고 된 것도 아니고 말이다..

님아 그 문에 들어가지 마오

이런 반골스러운 결말을 내는 것이 상업 영화 감독에게는 되게 용기가 많이 필요한 일인데 그거를 해냈다는 점에서 '날씨의 아이'를 좀 더 호평하고 싶었음.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는 이야기에 대의명분을 고려한다는 것 자체가 나는 말이 안된다고 생각하고.. 그런 차원에서 호다카의 선택을 응원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음..

 

물론 일개 급식 2명한테 국가의 운명이 달려있다는 시놉시스 자체가 매우 구리고 말이 안되기 때문에 이 영화가 막 별점 4점, 5점을 받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나.. 해당 시놉시스에서 뽑아낼 수 있는 가장 괜찮은 전개를 보여주는 영화라고 나는 생각함. 나름 고찰하는 재미가 있는 영화였기 때문에 '너의 이름은'과 '스즈메의 문단속'보다 0.5점 높은 3점을 줘보았다..

결론: 나츠미가 예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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